감당

2020.06.11

감당

 

실전은 참 무서운 것이다. 쉐도우 복싱을 하고 미트를 치고, 이런 준비를 하고 연습을 한다.

막상 링 위에서 스파링을 하면 생각할 시간도 틈도 뭘 준비하고 연습했는지 그냥 엉망진창 헛손질에 흐엌 뒤지겠네라는 생각 뿐이고, 그냥 막 뭐라도 하는 거다.
이 스파링 조차 풀스파링이 아닌 연습인, 실전이 아니란 것이 더 무섭게 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것이 철학을 배우는 것이, 그 뭐라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삶에 있어 우울에 빠지거나 좌절한 채 주저앉아 우는 것 대신 뭐라도, 헛손질이라도 할 수 있게 하는 것.

또 그러지 않으면 어쩔건가. 예측 불가한데.

준비와 예측,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행동일까.

삶 앞에 실전 앞에서, 감당이라는 것조차 오만이라는 것을.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허우적 하는 거다.

계곡물 위의 나뭇잎이 된 기분이다. 몰아치는 삶의 역동적 파동에서 그냥 이리저리 부딪히며 때때로 햇빛을 쬐며 행복해 하는 일.

얼마나 가볍고 허무한 것이 삶이라는 걸. 그 나약함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래서 역설적으로 자유롭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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