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비 탈출

2023.10.27

 

변비 탈출

 

 

글이 너무 밀렸다. 쓰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다 알면서도 쓰지 않았다. 다 알아서 못썼다는 것에 가깝다.

 

쓰면 하게 된다는 것이 좋으면서도 무서웠다. 글을 쓰려면 안 거치고 나올 수 없는데 나에게 중요한 부분을 쓰고 싶지 않아서 계속 피해서 아랫배가 무거워진 것 같다.

정신적 변비다.

 

하지 않는 나를 보는 마음이 나는 그저 답답한 마음 정도로만 느끼고 있었는데, 그것이 자기비하나 자기혐오의 감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감정이 선명해지고 나니 숨이 막혔다.

빡센 운동 수업이 좋았다. 그거라도 열심히 해서 조금 숨을 쉬었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사는 게 아니 아무것도(아무 의미 없이) 하지 않고 사는 것이 (그런 나를 보는 것이) 나한텐 너무 화가 나고 힘든 일 인 것 같다.

너무 많은 마음 속 부대낌과 갈등이 무색하게 지나보면 너무 그냥 하면 되는 건데 싶은 생각이 들어서 정말. 왜 또 그랬지.

 

전시 기획을 한 지인의 권유로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승낙해 놓고 시간이 지나 쫄리면서 벼락치기로 준비했다.

오랫만에 사람들을 만나니 좋았다. 전시를 갔는데 나는 과거의 어느 날에 간 것 같았다. 다들 뭐하고 살았냐면서 어디 있다 왔냐고 예상 못한 예전 인연들을 만났다.

심지어 우연히 대학 동창언니도 참여해서 만나서 대학 때 인연들까지 주르륵 만나고 소식도 들었다. 6~8년 전 인연들, 대학이면 10년전. 나도 반가웠고 나도 작품도 너무 좋아해 주었다.

나 너무 나의 과거를 부정했던 것 같다. 철학 공부를 하면서 이분법적 사고에 갇힌 내가 너무 한 쪽 면을 나쁘게 본 것 같다.

 

사업했던 나 – 나쁜 것, 사업했던 시절 – 암흑, 돈 버는 것 – 자본가 – 나쁜 것, 일하기 전 시절까지 방황했던 – 바보 같은 나, 대학시절 – 세상과 교수 말만 믿고 열심히 했던 우매했던 나,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못했던 것 – 나쁜 년, 못되게 굴은 – 철없는 나.

내가 분명히 삐끗했던 지점이 있다. 근데 내가 그걸 바보처럼 통으로 부정해버렸던 것 같다. 예전에 철학쌤이 말했던 사업을 예술처럼 한다는 말이 다시 생각났다.

나 어느 순간 순간은 살아있었는데 슬프기만 했던 것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방향을 잘못 잡은 탓에 점점 기쁨은 줄고 슬픔이 늘어가서 우울해졌던 건데.

내 삶의 기쁨들을 다 잊어버렸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기쁨이 하나도 없고 슬픔과 공허만 있었으면 죽었어도 벌써 죽었을 텐데.

점점 그렇게 되었던 과정이었다는 걸 잘 모른 채 다 슬픔으로 후회로 치부해버렸다.

 

돈 버는 일 자본주의 안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부분적이기만 한) 예술적?행동 들이었지만 어느 순간에도 나의 생각을 구현하고 나를 표현하는 일을 계속 해왔었다.

그때 내가 살아 있었고, 그래서 작업도 사업도 일도 할 수 있었던 거였다.

 

게스트하우스 한다고 인테리어 할 때 을지로에 가서 이태리제 타일 사와서 친구랑 바닥에 패턴 맞추고 망치로 뚜들겨서 멋지게 벽을 완성했을 때.

계속 밤 새가며 모든 곳을 다 청소해서 새것처럼 만들고 시트지 붙이고 페인트 칠하고 그림도 그려서 액자도 걸고 곰팡이 핀 베란다에 인조 잔디 깔고 조명 디자인해서 완전 다른 공간으로 만들었을 때.

다 처음이고 다 배우고 검색하고 시행착오 겪으며 다 발로 뛰어서 완성한 과정들이 힘들기만 한 건 아니었는데.

그런 즐거운 순간들이 떠올랐다. 게스트들 만나는 게 다 피곤한 일은 아니었는데. 새로운 사람 만나고 새로운 것 경험하고 하나 씩 만들어가는 게 좋았었는데 어느 순간 왜 다 끔찍하게 기억했지.

 

사업 아이템 개발하고 디자인해서 만드는 게 머리 아픈 일 만은 아니었는데. 머릿속으로 그리고 소재 찾아서 구현하고 완성했을 때 좋았었는데.

사람들 만나는 게 그렇게 짜증 나는 일 만은 아니었는데. 칭찬도 많이 받고 이런 저런 얘기하면서 즐거웠던 친구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냥 어느새 과거의 나를 떠올리면 못한 것만 생각나고 부족한 것만 성찰 하게 되어서 – 난 쓰레기네. 예전 사람들 만나면 다 미안하고 욕할 것만 같은 느낌에 빠져버렸던 것 같다.

 

그런 생각들 때문에 좀 걱정되고 두려웠지만, 전시를 준비하며 크게 부담도 없는 자리니까 내가 돈 버느라 못했던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조건, 단가, 시장반응 이딴 거 생각 안하고 작품을 만들어 봤다.

 

큰 형태 틀은 우레탄 폼으로 만들고 그 위에 지점토를 덮어 디테일을 만들고 아크릴 보조제 퍼미스를 섞어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하고 자연경화 레진을 덮어 코팅했다.

홈을 파서 안정기를 고정해서 전기 연결해서 형광등을 설치하고, 다른 건 납땜을 해서 매립하고. 원하는 사이즈 스위치 찾는다고 구로 공구상가 가서 쭈뼛쭈뼛 떨면서 돌아다녀 구하고.

새로운 걸 하면 가진 노하우와 내게 없는 것 까지 모든 걸 다 끌어다 쓰게 된다.

 

표현하고 싶은 주제부터 형태 소재 형식까지. 조건에 맞춰 나를 찌그러뜨리지 않고, 안되면 되게 하라! 원하는 것을 위해 조건을 이용하는 약간의 챌린지 같은 일이 오랜만에 너무 즐거웠다.

아무것도 안하고 돈만 쓴 내가 너무 싫었는데 그동안 놀면서 날려 먹은 것들이 헛되지 않아서, 이거 오천짜리 즐거움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튀어나온 것 아니고, 그 동안의 과정들이 있었으니까, 이제 시작점에 있는걸까.

 

전날 작품 설명을 적긴 해야겠는데, 제목 짓는 것도 오글거리고 있어 보이게 쓰는 설명도 너무 지긋지긋하게 싫어서. 그냥 내가 작품 만들면서 떠올린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편지로 써서 놓고 설명을 대신했다.

말로는 감정이나 표현이 어려운데 뭔가 나는 편지를 쓸 때 진짜 윤정이?가 되는 것 같다. 너무 이상한가 걱정했는데 에라 모르겠다 했는데 그냥 별 일 없었다.

원하는 대로 하길 잘했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전시와 사람들이라 좀 특이해도 괜찮았다.

 

전시 시간이 끝나고 네트워킹 파티 한다고 해서 맥주나 먹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카메라를 들고 영상을 찍으면서 전시 한 사람들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작품 설명을 하자고 했다.

나는 사람들 앞에 서면 떨려서 항상 긴장되고 뭐라 말해야 할 지 머릿속에서 마구 난리가 나는데, 막상 이야기 하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술술 잘 나왔다.

 

즉흥적인 여러 질문에도 대부분 자연스럽게 대답할 수 있었다. 가면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산다는 게 이렇게 자유로울 일이었나.

 

걱정된다 = 무서웠다. 나 하고 싶은 작품 위해서 돈 벌고 힘든 건 기꺼이 감당 할 거야. 그러고 싶어.

어후 씨발 씨발 할 수 있을까.

어케 말했습니까. 내 왕똥. 이제 겨우 나왔네.

어떡할거야. 아 씨발 모르겠다.

 

들뢰즈 철학 수업에서 교재를 읽을 때 어 문턱이라는 개념이 나왔다. 이거 예전에 이거 나한테 너무 크고 무거웠는데 이번엔 뭔가 힘이 된다고 느껴져서 좋았다.

철학쌤이 설명할 때 문턱이 의무가 아니라 격려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해 주어서, 나 너무 빗나가고 있진 않구나 생각했다. 철학을 배우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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