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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서울 | 윤정 X 혜민 X 길웅

저마다의 서울 | 윤정 X 혜민 X 길웅

 

글 김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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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그리고 곧 역사 속으로 사라질 동네

 

정직하게 말하자면,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서울 토박이로서,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던 마을이 사라진다고 하니 어쩐지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떤 곳이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조금 낭만적인 마음도 있었다.

부정형의 구불구불한 골목길,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계단길은, 네모반듯한 아파트촌보다 그럴싸한 배경이 될 것 같았다.

철저한 타자의 시선이었다.

 

 

백사마을로의 대규모 이주는, 1967년 청계고가도로를 착공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행정당국은 청계천변의 무허가 판잣집을 철거하고, 철거민들을 백사마을로 이주하도록 하였고, 이에 따라 이듬해까지 1,190가구가 백사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이주 당시에는, 버스가 하루에 두 번만 오가고, 우물조차 없었고, 1980년에 들어서서야 상하수도가 연결되었다.

현재도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연탄으로 난방을 하는 동네다.

 

강남에서 태어나 서울토박이로 40여 년을 살아온 나는, 올해 백사마을이 관리처분계획 인가를 받아 재조명될 때쯤 그 존재를 처음 알았다.

 

***

 

나와 이질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을 알고 싶기는 했으나, 두려웠다. 타자일 수밖에 없는 나의 관심은, 오해와 위선으로 읽힐 것이고, 실제로 오해와 위선이 맞다.

누군가 나에게 안락함이 권태로워지니 새로운 흥미거리를 찾았다고 비난하거나, 우리 영역을 아는 척 침범하지 말라고 쏘아붙이면 할 말이 없다.

 

그래서 태어난 대로, 가던 길 계속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질적인 세상을 등뒤에 두었다.

높은 뿔을 달고, ‘위’라는 한 방향만 보려 했다.

안정과 자본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요철과 주름이 없는 매끄러운 사람이 되려 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공허가 있었다.

요철과 주름을 없애려고 할수록,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던 관계들은 다 미끄러져 내렸다.

나를 보호하려고 애쓸수록, 아이러니하게 자연스러운 색을 잃어갔고, 내 것도 아닌 어지러운 욕망들이 찍혀갔다.

 

여전히 이질적인 타자에 대한 관심은, 위선과 오해에서 시작될 것이나, 달리 방도가 없다.

오해와 비난을 감수하고, 성실하게 한 걸음씩 다가가는 것 이외에, 터럭만큼이라도 타자를 이해할 가능성이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

 

백사마을과 판자촌 사람들에 대한 몇 권의 책을 읽었다. 아예 몰랐을 때보다 조금 알게 되었을 때, 이들을 설명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정부 정책의 희생양’이든가, ‘가난에 절망하는 빈민’과 같은 단어 몇 개들로 환원할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분명 가난과 소외, 고통이 있었다. 판자촌 주민들은 지속적인 가난, 강제철거, 빈번한 수재와 화재 등에 시달려야 했다.

 

판자촌 주민의 대부분은 변변한 자본이나 기술이 없는 빈농 출신이었기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다가 도시의 저임금 노동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용은 불안정했고, 소득은 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조그만 가게를 열거나 건설 십장으로 일하는 소박한 꿈도 이루기가 어려웠다.

이들은 정부의 정책이나 자본의 욕망에 따라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신세이기도 했다.

정부의 판자촌 재배치 계획에 따라 집을 철거당하고, 장기간 천막 생활을 하는 등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어려웠다.

 

 

때때로 비극이 있었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졌던 김현옥 서울시장은, 1968년 ‘3년이내에 서울 시내 무허가 주택 14만 동을 모두 철거하고, 판자촌 지구에 아파트 2,000동을 짓는다’는 목표를 밝힌다.

서울시의 창대한 계획이 진행되던 중인 1970년, 정부가 지은 와우아파트가 입주한 지 4달 만에 무너져 34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 원인은 부실 공사였다. 철근 70개를 넣어야 할 기둥에 5개가 들어갔다.

당시 서울시는 건축업자들에게 무리하게 낮은 단가를 요구했고, 건축업자들은 낮은 단가와 공사 수주를 위해 쓴 뇌물을 메우기 위해 공사 자재를 아꼈다.

 

시흥 3동 판자촌의 주민들은, 두 번의 산사태를 겪었다.

저지대에서 주택 침수 피해를 겪고 시흥 3동으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1977년 여름, 서울에 큰비가 내려 시흥 3동의 집 45채가 휩쓸리면서 24명이 숨졌다. 10년 뒤인 1987년, 같은 장소에서 또다시 산사태가 발생해서 주민 20명이 숨졌다.

 

 

비극이지만, 비극인지도 모르는 상황도 있었다.

1969년 판자촌이었던 마장동에 하숙하면서 쓴 대학원생의 일기를 보면, ‘나는 오늘 아침에 근처의 청계천변에서 갓 태어나 탯줄을 달고 있는 남자아이의 시신을 보았다.

누가 아이를 낳아 버린 것처럼 보였다.

이웃 사람에게 이 일을 파출소에 신고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의 말로는 이런 일은 이번 한 달 사이에 벌써 두번째라고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라는 대목이 있다.

 

그렇다고 판자촌 주민들을 ‘불행과 우울, 절망에 갇혀 버린 빈민’으로 박제해 버릴 수도 없다.

1969년 판자촌 주민들의 생활상을 기록한 일기를 읽다 보면, 새삼 그들이 얼마나 다양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느끼게 된다.

 

 

그곳에는, ‘시골에서 생활할 때는 시집 식구들이 살고 있어서 남편이 노름에 미치고 바람을 피워도 아무 소리 못했는데, 서울에 온 이후에는 남편에게 충고할 수 있어 주부로서의 위치를 찾았다’고 말하는 아주머니도 있고, ‘아무 직장이나 들어가서 돈을 벌고 싶지만, 안 맞는 일을 할 수 없고, 막노동이나 공장기술자로 들어가면 부모님이 장남인 자신에게 실망할 것이다’고 말하는 청년도 있었다.

해병대에 근무하다 상사폭행으로 불명예제대를 당하고, ‘아내가 그 전같이 자신을 대해주지 않는다’며 아내를 폭행하고 우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남편보다 더 수입이 많아지면서 무능한 남편이 답답하여 캬바레를 다니는 여자도 있었다.

그 일기에 등장한 대부분의 주민들은, 서울살이가 힘든 게 있다 하여도, ‘새로운 것을 볼 수 있고, 새로운 장소로 이동할 수 있으며, 시간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서울살이가 더 낫다고 여겼다.

한 음으로 울리던 목소리는, 사실 고저, 음색, 파형이 모두 다른 목소리였다.

 

 

***

 

어느 초여름, 우리는 곧 사라질 백사마을을 방문했다.

그 날, 우리는 잠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했고, 모두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나, 서울을 기억하는 풍경은 제각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모두, 등뒤에 중요한 것을 두고 걸어왔을지도 모르겠다.

 

“늘 꿈꾸던 조별 과제의 모습이었어!”

 

출사를 끝낸 후, 윤정의 목소리가 명랑하게 울렸다.

그 때, 백사마을 골목 어귀의 평상에, 셋이 다리를 쭉 펴고 앉아 깔깔거리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제야, 등뒤의 풍경을 마주보기 시작한 것 같다.

 

 

참고문헌

허남설, 못생긴 서울을 걷는다, 글항아리(2023), 13-72
박래군,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클(2022), 200-229
최협, 판자촌 일기, 눈빛(2012)
김수현, 가난이 사는 집, 오월의 봄(2023), 5-125, 148-183, 235-333

 

 


 

 

사진 신윤정 김혜민 장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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