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없이 하는 것

2022.01.01

 

기대없이 하는 것

 

복싱은 기대없이 한 것이 아니고, 시작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운동 선수 할 것도 아니고. 돈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순발력이나 운동 신경이 좋은 것도 아니고. 뭐 좀 재능이 있어서 남들보다 잘하는 우월함의 만족감을 가질 만한 것도 아니고. 운동으로 할거면 구지 위험하고 맞는 스포츠를 할 일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여자 복서는 칭찬 받는 위치도 아니다.

그냥 했다. 아 다 모르겠고 공중에 부유하는데 동아줄이 하나 내려왔으면 믿고 안믿고가 어딨나. 일단 잡아야지.

철학쌤이 운동하라고 동아줄을 하나 내려줬는데. 일단 해야, 된다던지 안된다던지 할 말이 있을 것 아닌가.

 

기대할 수 없는 것을 하면서 기대 없이 하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

 

복싱을 하는 것에서 복싱 외에, 다른 아무것도 신경쓸 게 없었다. 기대하는 것이 없으니 어떠한 목적도 목표도 없다. 그냥 잽이 잘 될 때 까지 그냥 계속 하는 거다.

그렇게 그 시간들이 지나 무슨 의미 인지 알게 되었다. 생각하고 살면 생각은 너무 오염이 많이 되어서 진실을 보기 어렵다. 몸으로 살고 깨닫게 된 경험이었다.

이제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인지 재능이 있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계속 즐겁게 하면 되는 거니까. 심지어 그랬을 때, 몸이 선택한 것이 재능있는 분야다.

 

바라는 것들이 있었다면 감각들을 묻어두고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거대한 목표를 위해 달리기 바빴을테니까.

그렇게 바라는 것 없이 순수하게 하면서 알았다. 어느 순간 내 몸이 활성화 되었다는 것을.

 

극한으로 밀어 부치는 순간에, 감각들이 살아난다.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의 개념처럼, 몸들이 판단한다.

두렵고 극한 순간에 가장 살아있게 모든 감각들이 아우라처럼 어른어른 기어다니는 순간이 온다.

몸이 말하는 내가 진짜 나라는 것이 느껴진다.

 

체육관에서 철학쌤의 뒷모습을 본다. 뛰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살아있으려 하는지 느껴진다. 그래 그렇게 살아있게 살아야지 나도.

 

복싱 다음에 활성화된 몸으로 조소를 하고 드럼을 친다.

시각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나는 디자인을 전공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치우친 시각성을 잘 안다. 시각만 쓸 때 문제다. 오감을 사용하는 것이 활성화 된 상태 같다.

듣기 좋은 곡, 좋은 향 이런 한 감각에 치우친, 학습된 긍정적 감성적 느낌이 아니다. 더 원초적인 감각인 것 같다. 좋은 노래가 나온다면 흔들흔들 춤을 추고 싶을 것이다. 감각이 나뉘어진 것이 아닌 몸의 전체가 감각이 되어 순간순간 뭘 쓸지 알아서 판단하는 것이다.

 

바닥부터 더 원론적인 것 부터 했어야 했다.

자본주의는 나를 관념주의자로 공중에 떠 있게 만들었다. 나의 헛발질을 알겠다. 나는 드럼 대신 작곡 부터 배웠다. 조소 대신 3D프린팅 부터 했다.

컴퓨터로 기술로 더 효율적으로 뛰어 넘으려 했다. 심지어 스포츠도 사격이 좋았네. 자본주의에서 몸으로 하는 노동집약적인 일들은 부정적인 것이다. 부품이 되는 세상만 보여준다.

그 곳에 다른 갈래의 몸을 쓰는 행복이 있다는 것은 비밀이다.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기착취적 생산기계들에게 알려주면 안된다.

 

돈 벌려면 관념적인 것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복제 가능한 콘텐츠들, 시스템을 만들고 소유 해야 한다. 실제의 시간을 살면 돈 버는 것에 한계가 있다. 그렇게 현실에서, 순간에서 멀어져서 관념 속에 묻혀 살거나, 심지어 부품이 되어서 설계 밖의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된다.

다시 기본으로 더 바닥으로 돌아가서 시작할 거다. 그 곳에서부터 기어 올라 올거다. 공중누각이 되지 않도록.

 

자본주의 안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불행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돈 있음은 행복인가? 중간에 한 영역이 있다. 공허의 늪지대가 있다. 돈 있음은 최소한의 안정까지 만이다. 그것을 넘으면 썩는다.

돈과 불행은 관계가 있다. 돈과 행복은 관계가 없다. 최소한의 안정의 바닥을 다진 후엔 옆으로 퍼지는 늪 대신 바닥을 다져 위로 올라가 행복을 잡아야 한다.

 

철학쌤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 때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거대하고 대단한 일이었다.

그 시간들이 늪을 땅으로 다져 만드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공중에서 허우적 대는 나를 다시 바닥에 서게 한 것이다.

 

점을 배운다. 기본기를 배운다. 잽을 배우고 훅을 배우고 바디, 회피 기술들을 배운다. 그것들을 연결하는 선은 내 몫이다. 가르쳐 주는 사람은 그 3차원의 고유한 선을 말해줄 수 없다.

점들을 계속 봐주고 고쳐준다. 그걸 잇는 선들은 내 몸과 무의식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조소도 조소 선생님이 내가 만들어 놓은 형태의 점을 봐주지 나의 손과 헤라의 움직임을 가르쳐 줄 수는 없다.

드럼도 하나하나 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지 하나를 치고 다음 것으로 넘어가는 선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몸에 쓰는 거다. 몸에 쓰는 방법은 몸에 집중해서 몸의 감각을 느끼기 위해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복싱이 조소가 드럼이 분야로서 점이 되면 그것들을 잇는 선이 또 만들어 지겠지.

 

기쁨의 지속의 시간은 정말 고속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리는 짜릿함이다. 슬픔의 지속과 기쁨의 지속을, 공허해지는 몰입과 즐거운 몰입을 생각해 보자.

기쁨의 지속은 하나의 점들 마다, 복싱의 잽 한 번, 조소의 한 터치, 드럼의 한 음 하나하나 그 순간 순간 짜릿하다. 그 점들을 계속 잇고 싶은 욕망이 속도를 내면 훌쩍 다른 시간에 와있는 것이다.

회계 작업을 해도 지속의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슬픔의 지속. 회계 안 틀리려면 엄청 집중해서 시간이 훌쩍 간다. 근데 그 숫자 묶음 들이 무슨 기쁨을 주나.

 

복싱에서 탈영토화를 한 것 같다. 다음으로 다음으로 쭉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공허해지는 슬픔의 지속이 검은 구덩이처럼 무서운 것이었다. 차라리 지속을 경험하지 않는 게 낫다.

그래도 후회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 슬픔의 지속으로 달려와서 이젠 쳐다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아쉬움은 없다. 방향이 틀렸을 뿐 달리는 깡을 배우기도 했으니까.

 

죽고 싶은 공허의 세계 밖. 눈 앞에 펼쳐진 기쁨의 고원들은 살게 하는 기쁨들이다. 재밌는 기대되는 일들이 있으니 그렇게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다.

 

역동적인 드럼과 정적인 조소는 언듯 보기에 상이해 보이지만, 그것들을 하는 나의 상태는 똑같다.

 

나는 많이 바뀌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나의 점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하나씩 조금 추가 되었을 뿐. 근데 모든 것이 바뀌었다.

 

들뢰즈의 말들이 이제 이해가 간다. 철학쌤의 설명이 이제 느껴진다. 왜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는지 그것이 최대한의 설명이었구나, 참.

이런 것들을 어찌 보여주고 알려줄 수 있단 말인가. 책의 두께 만큼 애쓴 마음이 담겼겠지. 그들이 본 세상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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